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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삼성 3대 세습' 일등공신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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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국민연금, '삼성 3대 세습' 일등공신 되려나?

[기고] 삼성과 엘리엇의 싸움을 보며

닫힌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두 정글자본의 싸움

오늘의 한국자본주의는 그 꼭대기를 장악한 소수의 재벌들이 3대째, 일부는 4대째 경영권과 부의 세습을 도모함으로써 폐쇄적 '세습자본주의' 성격을 굳히고 있는 중대한 전환점에 놓여 있다. 소수 재벌의 세습자본적 성격은 한국이 계층상승 사다리가 끊어진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 즉 닫힌 사회로 변질되고 있는 최대 요인 중의 하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한국경제 작동의 핵심 플레이어를 대표하는 두 마리 괴물이 숨 가쁘게 싸우고 있는 것을 불편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괴물 중 한 마리는 토종 슈퍼 재벌 삼성이고, 다른 한 마리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다. 둘 다 무책임하고 무자비한 '정글자본'으로서 두 번째라면 서러워할 역전의 용사들이다. 삼성재벌의 스타일이 검은 돈과 '떡값'으로 국가기관을 길들이면서 "킬링필드 노동자들의 무덤 위에서 경제적 성공을 이룩했다"(조돈문 외, <위기의 삼성과 한국사회의 선택>, p.11)고 할 정도라면, 엘리엇의 경우는 썩은 시체까지 파먹는 독수리라는 별명을 가진 잔혹한 '벌처펀드'로 악명이 높다. 그런 만큼 만만찮은 두 괴물의 승부는 예측을 불허하고, 딱히 어느 쪽을 편들기도 난감한 상황이다.

당신이라면 이 게임에서 어느 쪽에 판돈을 걸겠는가? 혹시 당신의 주요 관심사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삼성물산의 주가 동향인가? 만약 두 마리 정글자본의 어느 한쪽 편들기가 불편하다면, 우리 새우 또는 개미들에게는 어떤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노리는 것

그동안 한국사회는 늘 '삼성 예외주의'라는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재용이 지배하는 3대 세습 시대로 나아가는 삼성의 길도 탄탄대로였다. 국내의 어느 누가, 그 어떤 힘이 정-관-언-학 4각동맹의 막강한 비호 아래 편법, 불법, 초법으로 "법을 조롱해 온" (조승현) 삼성 일가의 파렴치한 행태와 치외법권적 특권을 막을 수 있었는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추진은 이재용 지배의 삼성 시대로 가는 최종 단계에서 실로 절묘한 한 수였다. 5월 26일 이사회에서 합병을 결의했고 오는 7월 17일 주주총회에서 최종 의결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합병 추진은 삼성 일가 입장에서는 두 마리, 아니 세 마리 토끼를 잡는 묘수였다고 볼 수 있다.

삼성 일가가 너무 덩치가 커진 삼성전자를 직접 지배하지 못하고 많은 순환 출자 고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주 큰 골칫거리였다. 삼성전자에 대한 이건희의 지분율은 3.38%, 이재용 지분율은 겨우 0.57%에 불과하다. 그런데 두 회사가 합병하면 삼성 일가는 통합삼성물산을 통해 삼성전자 지배력을 훨씬 단순한 방식으로 확보할 수 있다(아래 그림 참조).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주식을 4.1% 갖고 있는데 합병 후에도 삼성물산의 이 지분은 그대로 유지된다. 또 다른 고리로, 제일모직이 삼성생명 지분 19.3%를 보유하고 있고 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7.2%를 갖고 있다. 거기에 또 이건희와 이재용이 각각 삼성생명 지분을 20.76%와 0.1%를갖고 있다. 그리하여 이전까지 복잡하게 얽혀있던 순환출자 부담을 줄이면서 지배권을 안정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3세 승계 문제를 순탄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라는 사실이다. 두 회사가 합병하면 누구보다 이재용의 지배력이 가장 공고해 진다. 이재용은 삼성물산 지분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합병이 되면 이재용이 가진 제일모직 지분 23.23%가 통합 삼성물산의 지분 16.5%로 전환된다. 그는 통합법인의 최대주주가 된다. 그리하여 '이재용→통합 삼성물산→ 삼성생명·삼성전자→ 여타 계열사'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배구조 골격이 구축되는 것이다. 더구나 합병을 통해 삼성 일가는 막대한 추가 자금 부담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이재용 등 삼남매는 아버지가 보유한 계열사 지분을 법에 따라 상속받으려면 당장 6조원이 넘는 상속세를 납부해야 한다. 그러나 이재용이 통합 삼성물산을 장악하면 상속세를 납부하고 지주회사를 설립할 필요 없이 그룹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

<그림>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 후 순환출자 구조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국민연금은 '국민을 위한 연금'으로서 선택을 해야 한다

마냥 순탄하게 진행되는가 싶던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은 글로벌 벌처펀드 엘리엇이 제동을 걺으로써 갑자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제야 국내 여러 기관과 세력들도 엘리엇 '뒤꽁무니'를 쫒아 숟가락을 하나씩 얹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글로벌 투기 펀드가 개입하고 나서야 무소불위 삼성 일가의 사익 추구 행태에 제동을 걸게 될 수 있게 되다니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구조조정의 결과다.

지난 시기 IMF 관리체제아래 김대중 정부는 외자주도 자본시장의 힘으로 재벌을 규율하는 방식을 택했었다. 그러면서 또 재벌 계열사 간 출자 증대를 통해 총수 일가가 지배력을 유지 확대할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었다. 이에 따라 외자와 토종 재벌은 유연화/저복지/저출산/양극화 성장체제의 발전을 위해 서로 공생하는 관계에 서게 됐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외자도 재벌 일가의 사익추구 행동을 묵인해 주었었다. 그러나 이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경우는 그렇게 넘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삼성물산에 대한 삼성 특수관계인 지분이 낮았던 점 (14.4%)을 삼성측이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것도 그들의 큰 '실수'로 보인다. 혹시 삼성이 헤지펀드의 표적이 된다면 삼성물산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지적은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정환, <한국의 경제학자들>, 2014, pp.353~4 ). 이 대목에서 삼성 일가 또는 그 충실한 가신들이 일을 너무 쉽게, 안이하게 처리했다고도 할 수 있다.

삼성과 엘리엇 간 분쟁에서 핵심 쟁점은 합병 비율이 적정한가로 모여지고 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은 1대 0.35다(제일모직 주식 1주 가치가 삼성물산 주식 3주와 맞먹는다는 의미). 이 비율은 국내 자본시장법 시행령(제176조 5)을 따른 것으로 계열사 간 합병시 합병가액(기준시가)은 최근 1개월 평균종가, 최근 1주일 평균종가, 최근일 종가를 평균한 값을 기준으로 삼게 되어 있다. 그 결과 합병가액이 제일모직 15만9,294원, 삼성물산 5만5,767원으로 두 가격 간 비율이 1대 0.35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엘리엇은 삼성물산 주식이 저평가된 시기에 합병이 결정된 것을 문제로 삼고 있다. 또 자산가치에서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나 된다는 것이 문제로 되고 있다. 자산가치가 3배나 되는 기업을 0.35 대 1의 주가기준으로 합병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엘리엇이 주가 기준으로 합병 비율을 정해 놓은 국내법까지 문제 삼아 한국정부를 투자자 국가소송 (ISD)에 올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관련 기사 : "삼성 '무리한 합병' 추진, ISD '덫' 걸리나?")

이런 국면에서 우리는 특별히 국민연금의 선택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지분 10.15%(보통주기준. 우선주를 포함할 경우는 9.92%)를 보유한 1대 주주이다. 엘리엇(7.12%) 이외 외국인 지분(26.7%)의 향배라는 또 다른 중요 변수가 있지만, 합병 방향에 대해 거의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됐다. 2014년 7월 시점의 자료이지만 국민연금은 주식투자의 약 3분의 2를 5대 재벌그룹에 투자했는데 삼성에 대한 투자액이 최대였다. 삼성의 15개 상장사 중에서 삼성생명과 삼성카드를 제외한 13개 계열사에 대해 5% 이상 지분을 가졌고, 10%내외 지분도 삼성물산과 제일기획, 호텔신라 등 3곳이나 되었다(<CEO스코어>). 이런 식의 '삼성 사랑'으로 국민연금이 얼마나 수익률을 높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삼성전자 주가가 하락했을 때는 주가를 떠받치는 역할도 한 것으로 안다), 내가 묻고 싶은 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과연 '국민을 위한 연금'으로서 책임 있는 투자행동인가 하는 것이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국민연금은 상황전개를 보면서 시간을 끌다가 7월 주주 총회가 가까워진 시점에서야 태도를 밝힐 공산이 크다. 지금 국민연금은 두 가지 이분법적 선택지의 압박과 유혹을 받고 있다. 한 가지 선택은 지금까지 해 온 방식대로 삼성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증권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합병 안에 찬성표를 던질 것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다. 이 선택의 논리인즉, 아마도 외국계 헤지펀드 위협으로부터 토종 대기업의 경영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 합병에 찬성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주주가치 증대에 기여하는 방향이라는 논리를 들고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또 하나의 선택은 합병에 반대하는 것인데, 아마도 이 경우는 엘리엇이 합병반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대로, 합병가액 산정에서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이 침해됐다는 논리를 제시할 것이다. 이 움직임에는 삼성물산 소액주주들 그리고 시민사회의 '소액주주 진영'도 가세하고 있다.

그러나 제3의 선택지는 없는 것일까. 나는 국민연금에 '국민을 위한 연금'으로서 제3의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나는 국민연금에 이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단순히 두 회사의 합병이 아니라, 명백히 삼성 일가의 3대 세습과 사익 추구를 위한 시나리오의 일환임을 직시해 줄 것을 주문한다. 합병의 공식적 명분은 사업을 통합해 시너지를 극대화한다는 것이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국민의 연금'이 자신의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삼성의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3대 세습에 동조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둘째, 뿐만 아니라 나는 국민연금이 소액주주 이익 보호라는 협소한 관점에만 머물러서도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침해된 삼성물산 소액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본연의 역할은 그 이상이어야 한다. 국민연금은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일해서, 먹지 않고 입지 않고 납부한 노동의 결실이며 공적 저축기금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이 공적 저축기금의 투자기준은 주주가치 추구 이상의 '확대된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 노동자를 비롯해 중소기업 및 다수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국민경제와 우리 사회의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두말할 것도 없이, 국민연금은 국민들의 노후 소득보장이라는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이를 위해 단기적으로 수익률이 높은 투자를 하는 것이 결코 능사는 아니다. 고용률을 높여 세금과 보험료를 낼 수 있는 인구를 늘리고, 출산율을 높여 생산가능인구를 늘려야 한다(☞관련 기사 : 국민연금 기금, 투자 잘못해서 고갈 난다?). 국민연금은 이를 도우는 방향으로 투자하는 장기적 시야와 안목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소극적, 보수적 투자자 위치를 넘어 대기업 소유/지배구조의 일익을 맡아 책임 있게 주주권을 행사해야 마땅하다.

이상과 같이 국민연금이 확대된 책임성에 기초해 자신의 요구를 제기할 뿐더러, 나아가 삼성이 이런 요구를 적극 수용하는 일이 일어 날 수 있을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일을 기대하기에 앞서, 지금은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사안에 대해 맹목적으로 삼성 3대세습의 동조자가 되지 말고 국민의 연금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 국민연금이 새롭게 거듭나기를 기대하고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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